이코노미 스페셜

이제 2만원짜리 지폐도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임영재 2023. 1. 2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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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동네 음식점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같이 있던 아이에게 "아저씨가 아빠 말 잘 들으라고 주는 거야"라며 5만원을 건넸다고 합니다. 고맙기도 하고 놀랐기도 하고 아이한테 왜 이렇게 큰돈을 주냐고 좀 다투면서도 저도 이런 경우에 1만원은 너무 적어서 5만원을 꺼내야 하는데 부담스럽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5만원과 1만원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 같아요. 설 전후로 그래서 '3만원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가수 이적 씨가 처음 SNS에 올리면서 화제가 됐는데 공감한다는 목소리가 적었잖아요.

전 세계 주요 지폐에는 이러한 '중간액' 지폐가 이미 있습니다. 달러는 50달러에서 20달러 사이에 10달러 지폐가 있습니다. 유로화와 위안화도 마찬가지로 20위안, 20유로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세계 주요국 중에서 5천원, 1만원, 5만원, 1천원처럼 1, 5단위로만 지폐를 만든 나라는 한국과 한 곳만 더 있습니다.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2. 한국에서 처음 지폐가 나온 것은 1902년입니다. 당시 대한제국이 '호조태환권'이라는 지폐를 5량, 10량, 20량, 50량 등 4종류로 인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모두 소각되어 역사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실제로 사용된 최초의 지폐는 한국 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라 같은 해에 일본의 민간은행인 제일은행이 자신들 마음대로 발행한 '제일은행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의 단위도 '원'이 아니라 '엔'이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이렇게 생겼어요.

 

 

 

지폐마다 왼쪽 상단에 영어로 다시 금액을 적어놨어요. 그런데 보시면 1엔, 10엔, 5엔짜리밖에 없어요. 호조태환권에는 있던 20량짜리 중간단위 지폐가 이때 사라졌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일본 본토에서 사용하는 지폐가 5엔, 10엔, 1엔이었거든요. 제일은행이 그것을 그대로 복사해 온 것입니다. 이후 강점기 내내 화폐 단위 만원으로 바뀌었고, 계속 5원, 10원, 1원에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1, 5, 10으로 이어지는 지폐 단위는 또 하나의 일제 잔재라는 것이 됩니다. 120년이 지나도 우리는 한 번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어느새 당연히 돈은 1, 5, 10으로 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3. 그런데 단순히 일제 잔재라는 이유만으로 2만원권을 생각해보자는 것은 아닙니다. 틀이 단단해서 생각하기 어려울 뿐, 2만원 지폐를 만들면 사용할 곳이 또 많습니다.

미국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에서는 20달러가 사실상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폐입니다. 그 위에 100달러 50달러 지폐가 있지만, 미국 내에서는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ATM에서 50、100달러 지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200달러, 20달러를 빼도 300달러로 10장, 15장을 뱉어냅니다. 일반 가게들도 '우리는 20달러 이하의 지폐만 받습니다'라고 써놓는 곳이 꽤 있을 정도로 또 반기지 않습니다. 우선 사람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큰돈은 강도를 당할 수 있다거나 위험이 크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고, 가게 입장에서는 고액화폐는 위조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도 가지고 있습니다.

통계로도 입증이 됩니다. 발행된 것은 100달러 지폐가 가장 많습니다. 2021년 기준 177억 장이 세상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100달러는 유통용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80%가 미국 밖에 있고 그나마 금고에 넣어두거나 드러내기 어려운 불법 성거래로 주고받는 식의 의도하지 않은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정부 추산으로는 20달러 지폐는 인쇄한 후 너덜너덜해져 폐기되기까지 7.8년이 걸리지만 100달러 지폐는 22.9년 생존합니다. 그만큼 실생활에 쓰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 다음으로는 140억 장이 유통 중인 1달러 지폐가 2위입니다. 3위가 119억 장을 인쇄한 20달러 지폐입니다. 10달러 5달러 지폐가 각각 34억 장, 23억 장인 것과 비교하면 20달러가 4배, 5배 많이 나돌고 있는 셈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결국 미국에서는 지폐를 꺼내 쓴다면 20달러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유로화는 가장 발행된 지폐가 50유로입니다. 전체 지폐의 49%,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16.3%를 차지하는 20유로 지폐입니다. 10유로가 10.2%니까 20유로가 두 배 가까이 많이 돌아다니게 되고 실생활에서도 20유로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4. 그래서 우리도 2만원권이 나오면 상당 부분 1만원권 영역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이지 쓸 때도 2만원짜리는 편한 부분이 많아요. 사용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5만원권과 조금만 넣어도 두께가 나오는 1만원권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대신 2만원권을 넣으면 더욱 실용적이고 편리합니다. 축의금 조의금도 5 혹은 10 대신 5+2 조합을 해서 7을 맞추셔도 되고 세뱃돈, 용돈도 다양하게 조합이 가능합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우선 정부가 새로 돈을 찍어내는 데 세금만 더 쓰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2만원권이 생기면 그만큼 1만원, 5만원권의 쓰임새를 물고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들여야 할 비용이 오히려 적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기준 5만원권은 30억 5천만 장, 1만원권은 16억 3천만 장이 나돌고 있습니다. 이 중 5만원권은 43.5%가 어느 집 금고나 장롱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실제 유통용으로 5만원권 중 50% 정도가 사용된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더해 2만원권의 용도까지 1만원권이 잠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 20유로, 10달러가 10유로, 20달러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처음에는 새 지폐를 인쇄해야 하기 때문에 초기 비용이 듭니다. 지폐를 한 장 인쇄하는 비용으로 보통 200원 정도 들기 때문에 1억 장 인쇄하면 200억원 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2만원권 1장이 1만원권 2장을 대체하는 효과를 내면 중장기적으로는 1만원권 발행이 줄어 전체적인 지폐 제조 비용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제 지폐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2만원 지폐를 꼭 내야 하느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현금이 필요한 사람과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분석해보니 여전히 한국 가구는 평균적으로 매달 51만원을 현금으로 씁니다. 그리고 1인당 지갑에 평균 8만2천원을 넣고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서로 돈을 주고받을 때, 교회 등에서 11쌍 낼 때는 1만원권을 많이 쓰고 경조사에는 5만원권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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