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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원조 꽃미남 배우' 김성일, 국내 최초 '매그리드' 개발했지만 웃지 못했던 이야기

임영재 2023. 1. 2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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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음료 흡입부를 길게 뺀 '머그리드'(일회용 커피컵 뚜껑)를 개발한 김성일 케이앤랩세일즈 대표. 많은 커피숍이 김 대표가 개발한 머그리드를 사용하고 있다. 사업 근황을 묻자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짜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가짜를 만드는 사람보다 그걸 알면서도 사는 사람이 더 비양심적이에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정책당국은 더 큰 문제입니다.

김 대표의 원래 직업은 배우였다. 1981년 MBC 1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드라마 무풍지대(1989)의 땅콩 역을 비롯해 영화까지 오가며 활약했다. 1980년대 원조 꽃미남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아내와의 갈등으로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김 대표는 19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사업가로 변신했다. 세계 최초로 5.1채널 헤드폰을 개발해 3년 만에 회사를 매출 500억원으로 늘렸다. 하지만 계약 실수로 순식간에 신용불량자가 돼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그때가 2012년이었다.

김 대표의 마그리드는 헤드폰 사업이 순조롭던 2002년 미국 출장 중 우연한 계기로 탄생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입술이 데었는데 순간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마그리드 이미지가 떠올랐다. 서둘러 냅킨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개발해 2004년 특허까지 받았다. 헤드폰 사업이 도산한 뒤 마그리드로 재기하기 위해 특허를 보완했고 디자인까지 더해 2014년 특허를 재등록했다. 당시 등록한 마그리드 특허는 3건, 디자인은 74건이었다.

처음에는 잘 됐다. 자영업자를 비롯해 당시 유명 대기업이 운영하던 커피 프랜차이즈 A사에서도 김 대표 제품을 발견했다. 미국 커피숍에 수출도 했다. 경남 산청군에 있는 공장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한 뒤 커피전문용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에 납품하는 방식이다. 1000개들이 한 상자 가격이 2만5000원, 개당 25원이다.

 

그 김 대표는 2020년 한 커피박람회에 참석했다. 부스를 차리고 열심히 제품 홍보를 하던 중 한 커피숍 주인이 김 대표를 찾아와 가격을 문의했다. 김 대표가 대답하자 해당 점주는 "이와 같은 제품을 훨씬 싼 가격에 팔고 있는데 누가 사겠느냐"고 혀를 찼다. 김 대표는 "국내외에서 만들어진 짝퉁 제품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지만 기존 고객사들도 점차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며 "짝퉁을 쓰면 나중에 법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알려도 그건 그때 해결하면 될 일이라고 무시했다"고 말했다.

A사의 요구사항이 많아진 것도 이 시기다. 김 대표는 "대기업 납품은 가뜩이나 마진율도 좋지 않은데 제품에 작은 불량이라도 발견되면 시말서를 쓰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는 등 너무 까다로웠다"고 털어놨다.

김 대표는 가짜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려다 이내 포기했다. 수 억원대 소송비용과 수년째 이어지는 긴 소송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짝퉁 제품 종류도 수십여 개에 달해 주변 변호사와 변리사가 일일이 대응하면 오히려 손해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김 대표는 "당시는 특허침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특허침해를 하더라도 벌금 몇 천만원만 내면 그만이었다"며 "2019년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특허침해에 대한 고의성 판단요건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거나 권리자에게 무리하게 입증책임을 부여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막대한 특허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특허 수를 줄였다. 현재 보유한 마그리드 특허는 2건, 디자인은 40여건으로 줄였다. 현재도 연간 수 천만원대의 특허 유지 비용을 내고 있다. 김 대표는 "몇 억원씩 돈을 들여 제품을 개발하고 매년 몇 천만원을 특허유지비로 써도 우리 같은 소상공인은 특허침해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한 사람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제품이 되고, 그것이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업이 되도록 정부가 제대로 된 보호장치를 마련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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